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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33. <부정공>탄운선생휘학수가장(灘雲先生諱學洙家狀)
1. 문헌 목록 〉23. 23世 〉35. <부정공>율정공휘인영가장(栗亭公諱縯永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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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부정공>죽포공휘기영행장(竹圃公諱基永行狀)
竹圃公諱基永行狀 公諱基永字老睍號竹圃趙氏系出玉川肇祖諱璋高麗光祿大夫檢校大將軍守門下侍中生諱洪珪版圖判書生諱佺文科 贈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諱元吉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號農隱與鄭圃隱偰芸亭協贊王室爲三重壁上功臣嘗有贈鄭圃隱詩又有李牧隱贈詩功存宗祊義重士友諡忠獻享武夷院生諱瑜世稱虔谷先生根天之孝以進士文科官中顯大夫典農寺副正麗亡守罔僕義東史曰前副正趙瑜採薇之志隱德不仕 世宗旌孝褒忠享謙川祠生諱斯文 贈吏議兼經筵叅贊官行脩義副尉左軍司正生諱智崙齊隆叅奉參禮道察訪孝友著於世與伯仲孝畢生同處一室世稱相好亭生諱穩 成宗己酉進士丙辰厚陵叅奉遷尚瑞院直長生諱淑璟忠順衛生諱大春號三灘蔭勵節校尉當乙巳士禍之際隱德不仕作菟裘於距家五里漾碧江上扁曰漾碧亭沉晦講學河西金先生玉峰白先生相與福從有唱和詩石面有三賢船遊錄生諱懋叅奉晚德金公大器輓曰江南大老趙夫子篤厚風流世莫儔生諱晫宣敎郎生諱時聖丙亂擧義載湖南倡義錄以孝在 高宗辛卯 命旌屢傳而諱器夏敬事其本生兄生員崇夏兄歿有割臂願見江南樂府遊尹屏溪門文行俱著嘗受玉川書院廟庭碑文於金渼湖門不幸終命於漢師旅邸金相國在魯及諸章甫有誄與祭文寔公之六世以上也高祖諱澤根曾祖諱馨燁賑施遠近輿頌洋洋祖諱憙奎文行俱著爲世所推考諱鍾琥號龜軒文行夙就頗有聲望不幸早夭妣慶州鄭氏在衡女延安李氏昌九女公李氏出也 哲宗辛酉十二月十九日嶽降于順天大龜第俊莊不群幼不好弄四歲失怙七歲又遭大父喪哭泣之哀饋奠之謹人皆嘖嘖稱其幼年周詳十九歲遭曾大父喪攀號哀毀如不欲生曰孑孑此身幼背父祖但被養於曾祖而爲命今又至此此將奈何凡附身附棺極其隆厚而無憾焉時偏慈在堂定省之節志軆之養毫無違忓或有不安節露禱嘗藥靡不用極必致獲效後復膳及喪憑尸哭擗感動傍人情文備摯有善居喪之稱後値喪餘之日則恒如袒括之時至老不衰公自幼慧竇夙開自就傳來不煩程督經史子集淹貫迨盡畧工公車而見士習奔競遂絶意場屋但居家行誼不踰規矩至於外内之別甚嚴有法雖婢僕輩不敢相謔相慢於前故户庭肅然而己藹然而己蚤自先壟及親塋謹恪禁護石儀與圭田次第贍置曾有墓奴竊賣圭田者左右欲訟而懲之公力而止之曰此乃迫於窮者也遂寝之而益其資平日田園所牧不過皮穀百包而恒損衣削食冠巾衣蔑或至補破絶不涉於濫與侈每恨蚤孤終鮮凡自功媤之親以及疎族濶戚視同近黨恩愛頗篤或有吉凶大事則佽助不尠每歲春季損數十斛均給隣里之最寠者以資其食與種性又好客東西朅來之賓旅闐門矣盈座矣一任款治情意無缺晚育一男雖甚鍾愛敎嚴有度而設塾延師與村秀同硯有紙筆未備者亦皆資用習學焉値周甲生朝或勸擧壽觴公愀然曰孤露餘生當此倍悲之日安忍爲飲讌耶牢辭不背即折田券若于頃與天餘鏹分惠家䣊之貧戶然自欿則甚矣嘗與再從兄灘雲學沫族叔滄菴鍾悳重建漾碧亭遹追先懿每當良辰則往來風詠灑然有出塵之想時鄉人士以公之衆行將剡薦于有司公聞之愕然曰時欲重吾無狀耶即索本紙而拉之閑居讀栗谷先生疏章曰尊君庇民捨時書奚求又覽丁茶山牧民心書曰靡勤者所可勉奸猾者所可懼又論涑水翁智伯論曰才勝德不若愚拙之爲愈此皆平日讀書之效不可誣者也每對賓朋談屑繽紛皆有據於古書亦足聽聞未嘗及新俗鄙俚之説所居室顔之以龜南田舍者非直爲愛吾廬而己盖欲渾跡於田夫野老之間而止可以見潛德之一端也丁丑遇嬰二竪迺出錢千餘鏹均給同黨與六婿亦如甲朝之己事每戒嗣子東厚奉先飭躬言皆痛其年八月十四日考終春秋七十七葬於村南鸛峰下乾坐一遷其上壬原操文而奠述誄而哀與執紼臨壙者屢百人前配星山李氏合兆也有三女延日鄭海國朔寧崔成壽長水黃華周壻噫公之正直之奇不涉脂韋重厚之量可容齷齪至於孝義之性本立之學可無愧於古之躬行君子者非此也耶有詩文畧干卷藏于家東厚以其宗老炳寬甫所作行冶一通要余復爲狀德之文竊念余於公忝在末契者十年一二知公或不遜於餘人故妄加增刪檃括如右世之立言家併取裁擇焉 濟州 梁箕黙 撰 죽포공휘기영행장(竹圃公諱基永行狀) 공의 휘는 기영이요 자는 노현(老晛)이며 호는 죽포고 옥천조씨인데 시조 휘 장(璋)은 고려국 광록대부 검교 대장군 수 문하시중이요, 생휘 홍규(洪珪)는 판도판서며 생휘 전(佺)은 문과로 증 삼한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광록대부 옥천부원군이고 생휘 원길(元吉)은 대광보국 광록대부 옥천부원군에 호는 농은인데 정포은 설예정으로 더불어 왕실을 도와 삼중 벽상 공신이 되었으며 일찍 정포은과 이목은에게 준 詩가 있었다. 공은 종사에 있고 의를 사우에 중히 여겨 시호는 충헌으로 무이원에 배향되었으며 생휘 유(瑜)는 세상에서 건곡선생이라 칭하고 근천의 효행이 있었으며 진사로 문과하여 벼슬이 중현대부 전농시 부정이었는데 고려가 망함에 절의를 지켜 동사(東史)에 보면 전부정 조유는 伯夷와 같은 淸白한 뜻이 있었다라고 쓰여있다. 덕을 숨기고 벼슬 아니하니 세종께서 충효를 정포하였고 겸천사에 배향하였으며 생휘 사문(斯文)은 증이의겸 경연 참찬관 행수의부위 좌군사정이요 생휘 지륜(智崙)은 제릉참봉 삼예도 찰방으로 효우가 세상에 나타나 백중, 계, 씨로 더불어 평생 한방에 거처하니 세상에서 상호정이라 칭하였으며 생휘 온(穩)은 성종기유(己酉)년에 진사하고 병진(丙辰)년에 후릉 참봉으로 상서원 직장에 옮겼다. 생휘 숙경(淑璟)은 충순위요 생휘 대춘(大春)의 호는 삼탄이요 음 여절교위로 을사(乙巳)사화의 상황을 판단하고 덕을 숨기고 벼슬을 떠나 집에서 五리쯤 떨어진 양벽강에 隱居할 곳을 만들어 양벽정이라 현판하고 조용히 앉아,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하서(河西) 김선생 옥봉(玉峯) 백선생등과 交遊를 갖고 서로 읊조린 시가 있고 바위에 三현 선유록이 새겨져 있다. 생휘 무(楙)는 참봉인데 만덕(晚德) 김공 대기(大器)가 애도하여 말하기를 「강남대로 趙夫子의 독후한 풍류를 세상에서는 짝할자 없다 하였다.」 생휘 탁(晫)은 선교랑이요 생휘 시성(時聖)은 병란에 義擧를 하였던 관계로 호남 창의록에 실렸고 효행으로서 고종 신묘(辛卯 一九八一)년에 정포를 받았으며 여러번 전하여 휘 기하(器夏)는 그 생가 형님 숭하(崇夏)를 공경하며 섬겨 형이 별세하니 활비원이 있어 강남 악부에 보이고 윤병계 문하에 놀은 제자로 학문과 행의가 함께 나타났으며 일찍 옥천서원묘정비문을 김미호에게 받으러 갔다가 불행히 한성 여사에서 별세하니 김상국 재노(在魯) 및 여러 선비들의 만사와 제문이 있었으니 곧 공의 六세 이상이었다. 고조 휘 택근(澤根) 증조의 휘는 형엽(馨燁)인데 원근에 기민을 먹여 향리에 칭송이 양양하였다. 조의 휘는 희규(憙奎)인데 학문과 행의가 함께 나타났고 고의 휘는 종호(鍾琥)요, 호는 귀헌인데 문행이 일찍 진취하여 자못 성망이 있더니 불행히 일찍 작고하였으며 비는 경주정씨(慶州鄭氏) 재형(在衡)의 따님과 연안이씨(延安李氏) 창구(昌九)의 따님인데 공은 이씨 소생이다. 철종(哲宗) 신유(辛酉 一八六一)年 十二月 十九日에 순천 대구 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준걸하고 씩씩하여 무리에 뛰어나고 어려서부터 히롱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四세에 아버지를 잃고 七세에 또 대부상사를 당하였는데 사람들은 공이 곡읍한 것과 삼가 전올리는 예절에 대하여 그 어린 나이에 자상하게 주선한 것을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十九세에 증대부 상을 만나 더우잡고 부르짖으며 슬퍼한 나머지 삶에 대한 회의를 갖고서 말하기를 「고독한 이몸이 어려서 조여부를 잃고 다만 증조의 양육을 입어 구명하였는데 이제 또 이 지경에 이르니 이를 장차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몸에 부치고 널에 붙여 극히 두텁게하여 유감이 없이하였다. 그 당시 어머니가 집에 계시니 문안 절차와 지체의 봉양을 추호의 어김도 없이하고 혹 병환이 나면 노천에 빌고 약을 맛보아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반드시 효험을 본 뒤에 식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상을 당하자 시체에 기대어 울고 가슴을 두드리며 슬퍼하여 주위 사람을 감동케 하는등 정과 예를 모두 갖추니 주위 사람들은 훌륭하다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탈상한 후에도 항시 초상때 같이 하여 늙도록 폐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어려서부터 머리가 총명하였으며 입학한 뒤에도 정독을 아니하였으나 경사 「자」 집을 통달하였다. 대략 과거 공부도 하였지만 선비가 경쟁을 일삼는 것을 보고 마침내 정독에 뜻을 끓고 다만 거가하여 행의는 법도를 넘지 아니하며 내외 분별을 엄격히하여 비록 비복의 무리라도 감히 앞에서 해학치 못한고로 초정이 숙연하였다. 일찍 선산 및 친산을 정성스럽게 수호하고 석물과 제전을 차제로 넉넉히 마련하여 두었는데 일찍 산직이가 투매한 자가 있어 좌우에서 송사하여 증계하고저 하니 공이 힘써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이는 빈궁에 몰린자라 하여 마침내 그만두고 더욱 제전을 증식하였다. 평일에 전원에서 거둔것이 것곡식 백포에 불과한데 항시 의식과 관건에서 덜어 혹 떨어진 것을 기워 입고 절대로 사치를 엄금하였다. 매양 일찍 아버지를 잃고 형제 없는 것을 한하여 무릇 유복 지친으로 부터 먼 친척을 근친 같이 보아 은혜로 사랑함이 자못 독실하고 혹 길흉대사가 있으면 많이 보조하였다. 매년 늦은 봄에 수십점을 내서 이웃과 마을에 가장 빈궁한 자에게 골고루 시여하여 식생활과 종자에 보태도록 하고 성정이 또 손님을 좋아하여 동서로 가고 온 손님이 문을 메우고 자리에 가득하여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흡족하여 정의가 넘쳤다. 늦게 一남을 기루어 비록 심히 사랑하나 가르침이 엄하고 법도가 있으며 서당을 설치하여 스승을 맞이하여 마을 수재와 벼루를 함께 하며 지필을 갖추지 못한 자가 있으면 다 주어 학습하게 하였다. 그 환갑 생졸을 당하여 혹 수연을 배설하자 권하니 공이 슬픈 빛을 띠며 말하기를 「괴로운 인생살이 슬픔이 배나 되는 날에 어찌 참아 잔치를 한단 말인가」하고 굳이 사절하였다. 전답 약간 이랑과 돈 천여 궤미를 덜어 집안내의 가난한 집에 나누어 주어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스스로 서운함을 금하지 못하였다. 일찍 재종형 탄운 학수(學洙)와 족숙 창암 종덕(鍾悳)으로 더불어 양벽정을 중건하고 이에 선의(先懿)를 따라 매양 좋은 때를 당하면 왕래하며 풍경을 읊조리니 깨끗하고 산뜻한 것이 티끌을 벗어난 기상이 있었다. 고을 인사가 공의 여러 행의로서 장차 공정하게 유사에게 천거하니 공이 듣고 놀래며 말하기를 이는 거듭 나를 무상하게 하고자 하는 것인가 곧 본초를 찾아 압수하고 한가이 거하며 율곡(栗谷) 선생 소장을 읽으며 말하기를 「인군을 존경하고 백성을 비호하려면 이 글을 두고 무엇을 구하리요.」 또 정다산 목민심서를 보며 말하기를 「부지런하지 못한자는 가히 힘쓸 것이며 간활한 자는 가히 두려워 할 것이다.」 또 속수옹(涑水翁은 司馬溫公)의 지백론을 말하기를 「재주가 덕을 승하면 우졸한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으니 이는 평일에 글 읽는 효력을 가히 속이지 못하겠다. 매양 손님과 벗을 대하여 담론한 것은 옛글에 의거한 것이라. 또한 족히 청문하겠고 일찍 세속 비루한 상말은 아니하였다. 거처한 방 현판을 귀남전사(龜南田舍)라 한 것은 바로 내초막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대개 자취를 농부들과 같이 하고자 함이니 가히 잠긴 덕의 일단을 보겠도다. 정축(丁丑)년에 병이 걸려 돈 천여 궤미를 내어 친척과 여섯 사위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회갑때와 같이 하였다. 매양 아들 동후(東厚)를 경계하되 선영을 받들고 몸을 신칙하라. 말이 다 슬프고 엄하였다. 그해 八月 十四日에 고종하니 춘추는 七十七세요 마을 남쪽 황새봉 아래 건좌에 안장하였다가 그 뒤 임원에 옮기니 제문을 가지고 전을 올리고 제문을 지어 슬퍼하며 상여줄을 잡고 광중에 임한자가 여러 백명이었다. 전배 성산이씨는 合封이요 삼녀를 두었는데 연일(延日) 정해국(鄭海國) 삭녕(朔寧) 최성수(崔成壽) 장수(長水) 황화주(黃華周) 처며 재취는 함안윤씨로 一남三녀를 두었는데 남은 동후(東厚)요 딸은 죽산(竹山) 안종칠(安鍾七) 관산(冠山) 임병익(任炳翊) 제주(濟州) 양회례(梁廻禮) 처고 동후 아들은 광욱(光昱) 광안(光安) 광우(光宇)다. 아! 공의 정직한 기운이 비열한 곳에 이르지 않고 중후한 기량이 가히 양협한 것을 용납하며 효의의 성품과 본립의 학문은 가히 옛적에 몸소 행한 군자에 부끄러움이 없는자가 아니겠는가 시문 약간이 집에 있고 동후가 그 종노 병관(炳寬)씨가 지은 행장 한통을 가지고 나에게 장덕의 글을 지어 달라 요청함으로 가만이 생각하니 내가 공에게 욕되게 十년 一二의 말계가 있으나 공을 아는것이 다른 사람에 내리지 아니한고로 망녕되게 더하고 깍아 위와 같이 굽은 곳을 펴고 모난것을 바로하여 세상에 말을 바로 한자의 채잭을 기다림. 제주(濟州) 양기묵(梁箕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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